"옷소매 붉은 끝동은 이야기며 인물들까지 대부분 사료에 근거한 실화입니다."
판타지적 요소를 기대하고 이 책을 읽으신다면 실망하실 겁니다. 맹목적인 사랑, 이능력, 흘러넘치는 감정. 이런 것들과 거리가 있습니다. 사실적이고 현대적인 소설입니다.
역사적 시간과 사건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사실적이고,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어버이는 어버이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서 현대적입니다.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스스로에게 부여된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동조한다는 점에서요.
성덕임은 승은을 두 번이나 목숨을 걸고 거부한 여성입니다. 그래서 작가가 그려내는 성덕임과 실제 인물인 성덕임이 비슷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덕임은 왜 궁녀가 당연하게 왕을 사랑해야 하는가? 자신의 마음은 자기 것이 아닌가?란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때에는 불손했던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제군주제에서 덕임 같은 가치관이라면 평탄한 삶을 누리기 어려울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정조의 짝사랑?! 덕분에 위기를 잘 넘어갑니다.
"후궁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누가 더 예쁨받았나를 따지는 사람은 많아도, 그 후궁들은 과연 왕을 사랑했을까 의문을 품는 것은 금기시 되었다. 왕의 손짓 하나면 주저 없이 옷고름을 풀어야 하는 시절이 과연 계집은 반드시 왕을 사랑해야 한다는 전제를 정당케 할 수 있을까? 임금이 내린 향기로운 옥석 첩지는 후궁의 머리를 짓누르던 한날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1권의 1부까지는 꽤나 지루하게 느껴져서 중간중간 다른 책을 집었습니다. 하지만 2부부터는 시간을 아끼고, 날아가는 시간에 줄어드는 페이지를 아쉬워 했습니다. 덕임이 청년 임금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삶을 행복하게 살길 응원하는 반면 청년 임금이 자신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세상의 중심이 덕임이 되길 마음속으로 주문했습니다.
덕임은 고집스럽게 덧붙였다.
"할 거야. 해야 돼.”
"왜?”
“지기 싫으니까.”
”엥? 누구한테?"
"난 절대로 당하고만 살진 않을 거야."
달아날 곳은 없어도 저항은 할 수 있다. 적어도 그가 보지 않는 곳에선 스스로 뜻대로 살고 싶다.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 스스로 무엇을 이루고 싶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대화체는 마치 조선시대가 아니라 현 시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술술 읽힌다는 점에서는 장점이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분위기가 잘 살아나지 않는 대화체이지만 왕실에 대한 설명이 시대의 상황을 가깝게 느끼게도 합니다.
"왕실의 정식 합궁은 대단히 민망하다. 지존 내외가 침전에 들면, 그 사방을 노숙한 상궁들이 에워싼다. 뭘 어떻게 해라 조언하거나 왕이 정력을 심하게 쏟을 경우 수습하기 위해서다. 사이를 가로막는 건 오직 얇은 병풍뿐이다. 상궁들이 보고 듣는 앞에서 정교를 맺는 것이다. 아직 어색한 내자와 합궁을 하는 것도 고역인데 누가 옆에서 지켜보기까지 한다면, 암만 대범한 사내라도 골이 날 것이다.
하지만 아녀자 입장을 살피면 왕은 불평할 처지도 못된다. 그쪽은 지켜야 할 규칙이 훨씬 많다. 눈을 뜨고 임금을 봐서도 안 되고, 소리를 내도 얀 되고, 옥체에 손을 대서도 안 되고, 마음대로 움직여서도 안 된다. 죽은 나무통처럼 가만히 누워서 끝마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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