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때문에 읽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어른의 어휘력》도 그런 책들 중에 한 권입니다. '어른의 어휘력'이라니.. 왠지 비밀에 싸인 무엇언가를 엿보는 것 같은 제목입니다. 아직도 어른이라는 단어가 저에게는 판타지적 요소가 있나 봅니다. 아직 정신적으로 어른이 되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차근차근 읽지 않고 곁에두고 목차에서 원하는 단락만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술 자리에서, 격한 토론의 현장에서 '말귀 못 알아 듣는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귀 못 알아 듣는 것에 대한 책임은 어느 쪽에 있는 걸까요?
서양 문화권에서는 의사소통이 명확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말하는 사람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동양 문화권에서는 '콩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합니다. 청자 중심으로 책임이 형성되어 있죠. 저는 이 문제에서 어느 한 쪽의 책임을 주장하기란 요원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서로의 경험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어휘를 선택한다. 그러나 현대인은 같은 시대를 살아도 동질의 문화권에 살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저마다 경험이나 생각이 다양하고 이제 부사와 형용사는 정확한 뜻을 전달한다기보다 서로 느낌이 통하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쓰는 듯 보인다."
사실, 주어나 목적어가 없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건 "보편적 공감대 위에 언어적 직관으로 소통"했기 때문이죠. 비슷한 지식이나 환경에 처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공유되지 않은 맥락으로 수신자를 배려하지 않는 말은 제대로 닿을 수 없습니다. 또 "수신자가 어떻게 느낄지에 대한 어감"도 생각해야 하죠. 명확한 의사소통이란 정말 남을 배려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언어가 정확하게 일치해야 될 겁니다. 그린데 우리의 경험이나 말들은 고유합니다. 삶의 모든 경험들은 우리 뇌의 미시적인 세부구조를 변화시키죠. 우리의 경험이 유일무이하고 우리의 정체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같은 단어로 표현했기 때문에 상대방이 나와 같은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상대의 표정을 보고 확신하곤합니다.
하지만 내가 읽어낸 정보들이 남과 표출하는 정보는 동일한 걸까요?
저자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1986년 1월 28일 11시 38분에 발사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됐다. 챌린저호는 발사 73초 만에 1만 4,020미터 상공에서 공중폭발하고 말았다. 이튿날 여러 컷의 보도사진 중 유독 내 눈길을 붙잡는 한 장이 있었다. 젊은 여성이 불에 덴 듯 울음을 터트리고 어머니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애타게 상공을 올려보고 있다. 아버지는 멍한 얼굴로 울고 있는 젊은 여성의 손을 잡고 있다. AP통신이 현장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가족이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뇌리에 박혀 쉽게 떠나지 않았다.
반년 후 정정기사가 실렸다. 폭발 직후가 아니라 폭발 직전에 찍힌 것으로 가족이 지은 표정은 ‘충격에 휩싸여서가 아니라 ‘감격’에 겨워서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폭발 직전과 직후는 극과 극으로 다른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이 한 장의 사진에 들어 있는 세 사람의 표정은 우주선 발사 직후의 감격이라 해도 폭발 직후의 오열과 충격이라 해도 말이 된다.
이 오보를 계기로 나는 사람의 표정에서 생각과 감정올 알아낼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렸다. 표정을 읽는다는 게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의 투사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훨 씬 크다 여겨서다. 특히 어른이 가진 표정의 대부분은 언어와 더불어 대표적인 학습화와 사회화의 소산이다."
"뜻이 통하면 됐지 구태여 그런 수고까지 할 필요 있느냐 묻는다면," 이 명확한 의사소통을 위한 행위는 자신과의 대화에도 통용된다는 걸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도 남과 의사소통과 하는 동일한 매커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나보도 중요한 사람이 있을까요.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 |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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