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나면 공허한 듯, 가슴이 우묵한 듯 한 느낌이 드는 작품들이 있다. 『새는』이 나에게 그런 작품이다.
은호는 과거를 회상한다. 스스로 빛나던 시기의 과거, 고등학생 때다.
우리 학교는 문교부에서 시범 지정한 우리 시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남녀공학이다. 그렇다고 해서 티브이 드라마 〈고교생 일기〉 같은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고교생 일기〉에는 한 반이 사십 명도 안 되어 보이지만 우리 학교는 한 반이 육십 명이다. 중학교 때는 칠십 명이었으니 그나마 열 명 줄어든 것이다. 또 〈고교생 일기〉에 나오는 강수연이나 조용원처럼 예쁜 여학생들을 매일 볼 거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강수연이나 조용원은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도 상위 몇 프로 내에 드는 미인들이다. 우리 학교에 그렇게 예쁜 여학생은 없다. 다만 안문숙 같은 왈가닥 여학생들을 종종 볼 수 있을 따름이다. 피장파장이다. 우리 학교 여학생들도 손창민이나 이청 같은 남학생들이 아무 데에나 널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드라마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남학생 반과 여학생 반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말랑말랑한 교실 분위기,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선생님, 친구들과의 감동 어린 우정, 여학생들과의 미묘하고도 찌릿찌릿한 분위기 같은 것들은 모두 티브이 안에나 있을 뿐이다.
현실적이다. 하지만 은호는 시간이 정지하는 듯한 충격을 받으면 한 눈에 반하게 되는 은수를 만난다.
나는 그저 망연하게 서 있었다. 조금 전에 수돗가에 서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가슴이 멎는 것만 같았다.
땀방울이 맺혀 있는 이마는 매혹적이었고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서늘했다. 콧날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자연스럽고 싱그러운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손바닥에 물을 받아 얼굴로 가져가는 동작은 우아한 동선을 그렸다. 살짝 젖은 앞머리칼에서 부서지던 작은 물방울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쨍하니 반짝였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단발머리를 쓸어올리는 그녀의 손동작은 자연스럽고도 섬세했다. 그녀로부터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이마에서 흩어 지며 반짝이던 물방울 뒤에는 햇빛보다 눈부신 미소가 있었다.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마치 먼 곳에서 나는 것처럼 들렸고, 나는 낯선 곳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녀처럼 생긴 여자가 존 재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상형을 그려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이상형이 생겼다. 이제까지는 몰랐지만 그녀처럼 생긴 모습이 바로 내 이상형이었다.
나는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잔영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은호는 은수의 관심을 받기위해 기타를 배우기로 한다. 기타를 사기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선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한 달 동안 수고했다. 힘들었지? 이제 곧 익숙해질 거다. 다음달에도 열심히 해주기 바란다.”
요약하면 이렇게 끝날 말을, 대머리 소장은 삼십 분 이상을 하고서야 월급을 줬다. 한 달이 아니라 한 달 보름을 수고했는데 소장은 한 달치만 줬다. 그러곤 처음 보름 동안은 제대로 했다고 볼 수 없다고, 나중에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할 때 소장의 머리는 유난히 반짝였다. 여하튼 이만오천원. 첫 월급의 기쁨이란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 다. 일을 하고 받는 대가를 단순히 월급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것은 갈기갈기 찢긴 내 새벽잠이고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던 내 숱한 발걸음이고 내가 흘린 땀방울이다.
클래식 기타를 사고, 학원에 등록한다. 이제 은호, 은수, 현주의 이뤄지는 사람없는 삼각관계가 시작된다. 은호는 은수를, 현주는 은호를…….
이제 은호가 말하는 "너무 섬세해서 지루할 수도 있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방학이 달갑지 않았다. 방학동안에는 은수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은수를 본 이후 내 생활은 일주일 단위로 이루어졌다. 내 모든 신경은 체육시간이 있는 화요일 5교시로 집중되었다.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나는 또다시 다음 화요일을 기다리며 일주일을 보냈다. 체육시간이면 남모르게 줄곧 그녀의 모습만 바라보았다. 눈으로 사진을 찍어 머릿속에서 인화했다. 일주일 내내 그 사진만 보았다.
은수를 열망하며 기타를 치고, 문학을 탐독하고, 학력고사를 치른다. 그 시간동안 현주는 은호 옆에서 친구로서 도와준다.
그시절 그들의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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