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루.
그녀가 돌아오지 않았다.
불 속으로 뛰어들어 간 해루는 그대로 불길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더러는 잊으라 하였다. 더러는 그만 놓아주라 하였다. 땅 위에 발 붙이고 살아가는 목숨붙이의 인연이란 허망하게 스러지는 꿈결 같은 것.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
그러니 그만 잊으라 하였다. 그만 놓아주라 하였다.
하지만 어찌 잊는단 말이냐. 어찌 놓을 수 있단 말이냐.
한여름 밤의 꿈처럼 황홀하였던 너를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이냐.
해루야. 나는 차마 네가 그리워 잠조차 잘 수 없구나.
나는 차마 네가 서러워 꿈조차 꿀 수 없구나.
그러니…… 그만 돌아오너라, 해루야 너 떠나던 날의 기억일랑 내 머릿속에서 모두 지웠으니.
너만 돌아오면 된다. 그만 내게로 돌아오너라. 제발 돌아와다오, 해루야.
향은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향은 궁정의 사냥을 행하던 중에 낙마를 하고, 밤이 어두워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별이라도 보이면 길잡이 삼아 따라가련만.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난감한 찰나. 향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건……”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
도깨비불인가? 간혹 묘 근처에 출몰하는 도깨비불은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향은 불빛을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수풀을 헤치고 간신히 도착해 보니, 등이 굽은 나무에 등롱 하나가 걸려 있었다.
깊은 숲에 느닷없는 등롱이라니.
향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리 사람이 사는 민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은 더더욱 아닌 곳. 우거진 숲 한가운데 그저 등롱 하나만 덜렁 걸려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조화란 말인가.”
“헛것은 아닌데 이런 인적 없는 곳에 누가 등롱을 두었단 말인가?”
기이한 물건은 등롱 하나만이 아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등롱 너머로 붉고 노란 화려한 원색의 나비매듭이 보였다.
나비매듭은 숲 너머로 길게 이어졌다. 마치 나를 따라오라는 듯 매듭 끝자락이 휘날리는 것을 보며 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왁자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말 탄 사람들이 보였다. 그렇게 몰려드는 사람들 중엔 무혁도 있었다.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러다 문득 향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멀리 숲의 어둠 속에서 처량하게 흔들리는 등롱의 모습이 보였다. 어둡고 스산한 숲 한가운데에서 오도카니 있는 것이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었다.
'설마, 정말 나를 기다린 것이냐?’
맑은 하늘에서 돌연 비가 내리고 하여 그가 길을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나타난 불빛.
순간 톡.
작은 온기가 그의 섬장을 파고들었다.
소리 내어 표현하지 못한 아련한 그리움.
해루는 고려 충신들의 마을인 두문동 출신이기 때문에, 조선의 국법상 반란 가문이기 때문에 정체를 감추고 향의 미래를 밝혀줄 계획을 실행합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향은 해루를 찾아냅니다.
"왜 그러느냐?”
“…… ”
“해루야. 왜……?”
“싫습니다.”
“뭐?”
향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싫습니다. 싫다 하였습니다.”
거듭된 단호한 거절.
“내가…… 싫으냐?”
묻는 향의 목소리가 깔깔했다.
별안간에 허를 찔린 듯 머릿속이 아득했다.
내가 싫어? 내가 싫단 말이냐?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해루의 마음도 저와 같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던가? 향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가슴에서 돋아난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심장을 가차 없이 베어내는 듯한 격통이 느껴졌다.
향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해루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차마 그와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해루는 할 수 있는 최대한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그것이 향을 화나게 하였다.
“날 봐.”
자꾸만 밀어내는 해루의 손길을 제 손아귀에 결박한 채 그는 소리쳤다.
“날 보라 하였다.”
해루의 시선은 고집스레 바닥을 향해 있었다. 앙다문 입술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했다. 작은 어깨가 연신 흔들렸다. 그 모습이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향은 끝끝내 해루의 고개를 자신을 향해 돌려놓았다. 그녀의 눈을 직시하며 뜨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해라. 내가 싫으냐?”
“저는…… 저는……"
“분명히 대답해라. 내가 싫으냐?”
"저는……."
해루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싫습니다. 저하께서 이러시는 것이 정말로…… 진실로 싫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 해루의 입을 뚫고 나왔다.
문득 향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거짓.”
속삭이듯 향이 말했다.
그는 자신을 밀어내는 해루를 품속 깊숙이 끌어안았다.
“하지 마십시오. 하지 마십시……"
"소용없다.”
“저하.”
“발칙한 녀석. 평소엔 그리 잘 웃고 떠들고 속삭이더니, 정녕 중요한 순간엔 엉뚱한 말로 피하려 하는구나.”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 정말로 저하를……"
"…….흑."
해루의 입에서 기어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안 됩니다. 이리되면 안 됩니다. 이리되면……”
“아니. 이리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다.”
해루가 물기 가득한 눈을 들어 향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몰랐느냐? 이제는 네가 없이는 내가 살 수 없다. 그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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