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 같은 웃음 한 자락에 저 멀리 그려져 있던 무혁의 그림자가 당장에 문 앞으로 다가왔다.
“저하 괜찮으시옵니까?”
“괜찮다.”
해루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향이 대답했다. 다시 무혁의 그림자가 멀어졌다. 이번엔 해루가 향의 손등에 글씨를 새기듯 써 내려갔다.
‘무엇이…… 미안하단 말씀이십니까?’
‘네게 화를 내지 않았더냐? 진심이 아니었다. 그저….. 내 마음이 복잡하여 그런 것이다.’
‘마음이요? 마음이 어찌 복잡하신 겁니까? 무엇이 저하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겁니까?’
구미초(狗尾草, 강아지풀)처럼 손등을 스치는 보드라운 유혹. 몸이 움츠러들듯 은밀하고 간지러운 속삭임. 향은 붓을 들어 이번엔 해루의 동그란 이마에 글을 썼다.
‘나는[我]…..’
해루는 제 이마에 느껴지는 생경한 감촉에 또다시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하얀 웃음 앞에 향은 잠시 멍해졌다. 나는….. 무슨 글을 쓰려 한 것일까? 아니 무슨 글을 쓰고 싶은 걸까?
머뭇거리는 그를 해루의 검은 눈동자가 응시했다.
한참 말간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던 그녀가 재빨리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간질간질.
‘무어가?’
움찔움찔.
‘저는…… 저하가 좋습니다.’
무람없는 고백이 향을 향했다.
순간. 톡.
커질대로 커진 마음을 감출 수가 없게 된 해루. 세자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설레다가 실망하고, 실망하다 말갛게 기뻐합니다.
붉은 곤룡포가 그대로 해루의 작은 몸을 감썼다. 해루는 입술을 내밀었다.
“이리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뭐라?”
“아무리 이리하셔도 무슨 속셈이 있는 거 다 압니다.”
“무슨소리냐?”
“이 곤룡포의 용도를 제가 진즉에 알고 말았습니다.”
“곤룡포의 용도가 있었더냐?”
“네. 집현전 학사들 사이에서는 유명합니다.”
“무엇이냐?”
“일종의 채찍질이지요. 저하께서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학사들을 달리게 만드는 채찍과 당근이라고나 할까요.”
“…….”
“하여 궁금합니다.”
해루가 진실로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향을 응시했다. 그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향이 물었다.
"무어가?"
"지금 제겐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원하는 것?”
“네. 굳이 궁을 나서는 절 일부러 찾아와 용포를 덮어주시는 걸 보니, 분명 하찮은 요구가 아닌 모양이지요. 마음의 준비는 되었습니다. 뭘 해드리면 되는 겁니까?”
“정녕 알고싶으냐?”
“네. 알고 싶습니다.”
“알게 되면 놀랄 터인데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역시, 무슨 속내가 있었구나. 해루는 제법 당찬 얼굴로 향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감당할 자신 있습니다.”
“좋다. 정히 그리 원한다면……"
거친 악력이 해루의 양어깨를 휘감았다. 동시에 그는 붉은 곤룡포의 옷깃을 힘껏 잡아당겼다. 이내 향의 품으로 해루의 작은 몸이 풀썩 안겼다.
“저, 저하……”
해루의 눈에 놀람이 들어갔다.
“그것 보아라. 놀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그렇지만……”
“감당할 자신이 있다 대답하였지?”
해루를 바라보는 향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작고 조그마한 여인.
처음에는 그저 스쳐가는 인연이라 생각하였다. 언젠가 떠날 인연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많게 잊어버릴 만큼 어느새 해루는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한동안 아무것도 들을 수도,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백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다음은 자신을 그리 만들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잠식했다.
여인 때문에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 여인이 다름 아닌 해루라는 사실을 더더욱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 위로 다가왔다.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간택에 대한 해루의 심정은 확고해집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해 보라.”
“간택을 위해 궁으로 드신 세 분의 간택인 중 두 분은 무사하시나…… 해루 아가씨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아뢰었나이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일인지라, 향은 정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세히……. 자세히 설명하라.”
표정 잃은 세자의 물음에 최고 상궁은 한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말하라 하지 않았느냐!”
향의 호통이 우레처럼 떨어졌다. 깜짝 놀란 최고 상궁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그분께선 불길에…… 갇혀버린 듯 하옵니다.”
“불길에……. 갇혀?”
향은 시커렇게 변한 수강궁으로 눈길을 돌렸다. 느닷없이 일어난 불길은 굶주린 날짐승 같았다. 가을 메뚜기 떼가 들녘을 훑고 지나간 듯 화마가 거쳐간 전각은 검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새카만 잔해 속에 남은 것은 회색빛 잿더미뿐이었다.
저 속에 해루가 있단 말이냐? 아직 나오지 못했단 말이냐?
향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이내 신형을 휘청였다. 짙은 어지럼증이 밀려와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저하.”
곁을 지키고 선 무혁이 그의 팔을 잡았다.
“어딜 가시려 하옵니까?”
무혁의 물음에 향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너도 듣지 않았느냐? 해루가…… 오질 않았다질 않아. 그러니 해루를 데려와야 하지 않겠느냐?”
집념을 넘어 광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무혁이 뛰쳐나가려는 향을 붙잡았다.
“저하. 고정하시옵소서.”
“비켜라.”
“저하! 불길이 잡혔다고는 하오나 여전히 위험하옵니다. 게다가…… 상처가 깊사옵니다.”
“비키라 말하지 않았느냐!”
“저하……”
“해루가 저 안에 있다질 않느냐. 해루 그 아이가 불 속에 갇혀 있다는데 내 어찌 태평하게 치료나 받고 있겠느냐? 서둘러 가지 않으면 그 아이에게 큰일이 생길 수 있음이다. 그러니 비켜라.”
얼음이라도 삼켜버린 듯 차가운 음성.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그 서늘한 명에 무혁은 참시 당황했다. 그가 주춤하는 사이 저벅저벅, 향이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수강궁으로 들어서던 김담과 심운기가 향의 발치에 매달렸다.
“저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김 학사야말로 왜 이러느냐? 우리 해루라고 하지 않았느냐? 신루의 식구라고 하지 않았느냐? 헌데 어찌 모두 나를 말리기만 하느냐? 해루가 저 불 속에 있단 말이다. 그 작은 아이가……. 저 불 길 속에 홀로 있단 말이다. 그런데 어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내 앞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이냐?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 더 늦기 전에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된서리처럼 내리치는 목소리에 사람들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향은 해루가 잘못 되었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향은 하루를 수강궁에서 시작하고 수강궁에서 끝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모두 잊은 채 해루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찾지 못했다. 햇더미를 모두 뒤졌음에도 해루를 찾을 수가 없었다. 손톱 끝에 겸은 재가 가득했다. 어디서 긁힌 것인지 작고 큰 생채기가 향의 얼굴에 가득했다.
결심을 굳힌 무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그만 단념하십시오.”
“…….”
“저하, 해루는 죽었사옵니다. 아니, 행여 그 아이가 살아 있다고 해도 저하의 곁에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해루가 내 곁에 있을 수 없다?”
“이번 방화의 주범들, 옛 왕조인 고려의 충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수장이었던 박두언이 죽고 그 일에 가담했던 역도(遊徒) 마흔 세 명이 죽거나 잡혔습니다. 잡힌 역도들이 실토하지 않았습니까? 해루가 역도의 고장인 두문동 출신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해루가 두문동에서 태어난 것이 무에 잘못이란 말이냐?”
“해루는 역도입니다.”
“그 아이는 날 지켰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여렷 살렸다. 그런 아이가 어찌 역도가 될 수 있단 말이냐?”
“국법이 그러하옵니다. 나라의 법도가 그러하옵니다. 세상의 잣대가그러하옵니다.”
“……”
"해루는……"
무혁이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반역자입니다.”
쓰린 말이 향을 움직인 것일까?
내내 미동도 않던 향이 무혁을 돌아보았다.
"…... 혁아."
“저하”
“해루의 출신이 어디건 상관없다. 해루의 부모가 누구건, 해루가 누구의 핏줄을 타고났는지 내게는 눈곱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내게 해루는…… 그저 해루일 뿐이다.”
해루야……
탄식 섞인 긴 한숨을 끝으로 향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향은 빈궁과 후궁의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후 일년동안 향의 마음은 버석버석하게 갈라진 마음 그대로였습니다. 평소에도 차갑게 느껴지던 사람이 이제는 얼음처럼 느껴지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누구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눈빛 한 자락 주지 않았습니다.
일 년의 세월.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해루에게는 천 년보다 더 긴 시간 이었다.
화염으로 뒤덮인 불구덩이 속에서 어찌 살아 나왔는지, 기억이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불덩이를 끝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녀가 다시 눈을 떳을 때 제 몸을 감싸 안고 있는 덤이가 보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덤이는 그녀를 지켜주었다. 미소 지은채 늘하게 식어버린 덤이를 안고 비명과 한 섞인 분노를 쏟아냈다. 그러다 기절하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국경을 넘는 마차 안이었다.
화려한 마차 안에는 미려한 얼굴의 사내가 걱정스럽게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 것인지. 왜 마차를 타고 있는 것인지.
그때 사내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차라리 다행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마라. 나와 함께 살자꾸나. 나와 함께 떠나자꾸나.”
명나라로 떠난 해루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조선으로. 향의 좋지 않은 미래를 막기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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