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루는 사기죄로 도망을 다니다가 우연히 향을 만나 도움을 받습니다. 향은 순간의 재치로 해루를 골탕먹일 계획을 세워 계약을 맺습니다.
"수인해라"
"이게 뭡니까?"
"너를 숨겨주는 대가로 네게 원하는 것이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원래 내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네?"
"그런 것이 있다. 그러니 너는 여기에 수인하든가 아니면 밖에서 너를 찾고 있는 자들에게 스스로 걸어나가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다행히 협상이 조금 이루어저서 평생은 아닙니다.
"이게 무엇이냐?"
문서를 훑으며 향이 물었다.
"문서에 아주 사소한 조건을 달았습니다."
"조건?"
“네. 원하시는 대로 이제부터 저는 선비님의 종속입니다. 단...."
“단?”
“이곳에 계실 때만입니다.”
“이곳에 있을때만?”
"....네. 싫으십니까?”
혹시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까 싶어 해루는 두근거리는 섬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좋다.”
해루는 자신의 과거와 관련된 모종의 인물들이 아직도 자신을 쫓고 있고 지척까지 근접한 상황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소나기를 피하기 위한 처마로 향을 선택합니다.
“그만가시지요.”
“정말 고집도 대단하십니다. 그런 녀석을 왜 기다리는 것입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녀석인데...“
“이러실 때 보면 그분과 아주 판박이십니다.”
무혁의 말에도 향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향의 입매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왔다.”
감았던 눈을 뜨며 향이 중얼거렸다.
“너l?”
향이 한 곳을 턱짓했다. 어둠 저편에서 뛰어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잠시만요! 기다리십시오! 같이 가요!”
“누구냐?”
무혁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접니다! 해루입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목소리가 어둠 저편에서 들려왔다. 이유고 달빛 아래로 해루가 걸어 나왔다.
“너, 안 간다고 하질 않았느냐?” 무혁의 지청구가 어둠을 가로질렀다.
“가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말입니다.”
“마을을 떠날 수 없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 하지 않았더냐? ”
“맑은 물 한 사발 떠 놓고 치성을 드렸더니 놀랍게도 감쪽같이 나아버렸지 뭡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따져 묻는 무혁을 가볍게 지나친 해루는 대뜸 잔등이 비어 있는 말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향을 돌아보았다.
“뭐 하십니까? 이제 슬슬 출발하셔야지요.”
해루는 도성에 도착해서 향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저기 두목님. 저분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세자 저하라뇨?"
“네가 지금 듣고 보는 대로다.”
해루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나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상황. 해루는 향을 가리키며 무혁에 게 다시 눈으로 물었다.
정말로?
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생각 같은 건 할 사이도 없이 몸이 반응했다. 납죽 바닥에 엎드린 해루는 그 누구보다 큰 소리로 외쳤다.
“세자저하아아!”
향의 정체를 알게된 해루는 움츠려들었지만 스스로 세자의 최측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며 본래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향은 모종의 단체의 필살본의 게획을 알게 되고 그 계획의 시발점이 세자빈 간택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향은 세작을 가려내는 임무를 해루에게 부탁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지금부터 일다경의 시간을 주마. 그 안에 저 두루마리에 쓰인 모든 사항을 외워두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냥 읽는 데만도 반 시진은 족히 걸리겠습니다.”
“노력하면 할 수 있다.”
“노력해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습니다. 이건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내 너를믿는다.”
믿지 마십시오, 제발.
해루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향은 믿는다는 말을 연신 뱉었다. 그래도 못 하겠다며 해루가 울상을 지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 하였지. 내 직접 보여주마. 그리하면 이해하기 한결 수월할 것이다.”
“애초에 모르는 말투성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중전마마께서 즐기시는 차다. 이 차를 가장 맛있게 우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물의 온도가 중요하다.”
막힘없이 차의 이름과 맛, 그리고 우리는 방법과 음미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향을 보며 해루는 연신 감탄사를 흘렸다. 그리고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저하께서는 차를 좋아하시는가 봅니다.”
“회강다례를 하긴 하지만 즐기는 편은 아니다.”
“즐기지 않으신다면 어찌 이리 잘 아시는 겁니까?”
슥, 향은 양여섭이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쓰여 있질 않으냐?”
“그럼 지금 저걸 보고 하신 거란 말입니까?”
“한번 머릿속에 들어온 건 좀처럼 잊히지 않아서 말이다.”
해루의 어깨가 아래로 축 내려갔다.
“자세가 좋지 않구나.”
“의기소침해하는 중입니다.”
“어찌 시작도 하기 전에 의기소침부터 하느냐?”
“말씀드려도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할 건 없다.”
“이런 건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절대로!”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미래를 보는 소녀 해루는 왕궁이 불에 타고 가까이 있는 신루의 인물의 좋지 않은 일을 보게 됩니다.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다 자신을 배려해 주는 향의 마음이 풀어저 다시 노력하게 됩니다.
“어떠냐?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느냐?”
향의 물음에 해루는 물음으로 대답했다.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냐?"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험난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합니까?”
향이 움직임을 멈추고 해루를 쳐다보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비록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했지만 한 번도 주저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툭하면 길을 잃으셨지요.”
“에둘러 가긴 했지만 결국 원하는 종착지를 찾지 않더냐?”
“헤매는 것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그 끝에 가시덤불이 있을 수도 있고, 깎아지른 낭떠러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어찌 무턱대고 갈 수 있단 말입니까?”
“가시덤불은 치우면 그만이고, 낭떠러지는 내려갈 방도를 생각하면 될 일이다. 여정이 제아무리 험해도 그 끝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가야겠지.”
"설사 모진 여정 끝에 바라던 것이 없다 해도 말입니까? 고생만 하고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해도 말입니까?”
향이 소리 내어 웃었다.
“물론 결과도 중요하지. 결국 이루지 못하면 아쉽기도 할터. 하지만 보아라.”
향은 해루의 턱 끝을 잡고 슬며시 고개를 돌려주었다. 해루의 눈동자에 신루 학자들이 들어왔다. 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험한 길일망정 저들과 함께 걸으니 어찌 불행하다고만 하겠느냐?"
“함께이기에 그 결과가 불행하다 해도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동참해 주는 사람이 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에 동의하고 진심으로 함께 고민해 주는 사람이 있다. 저들과 저들의 마음을 얻은 것만으로도 결과가 무엇이든 실패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변화하려 노력하였으니 말이다.”
해루는 마음을 다잡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다시 세자비 간택전에 참여합니다.
중전이 해루를 보았다.
“…….”
“왜 대답이 없느냐?”
"저….."
해루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끝을 늘였다.
“말해 보아라.”
“더 주시면 안 될까요? 목이 타서 벌컥벌컥 마시는 바람에 맛을 제대로 보지 못하여…..."
해루가 슬그머니 빈 잣잔을 내밀어 보였다. 중전의 얼굴에 황당한 빛이 떠올랐다. 해루는 중전과 시선이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피눈물 나는 훈련의 성과였다. 지체 높은 분과 눈이 마주치면 어리둥절한 표정 대신 부끄러워하라. 김담이 일러준 내용대로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급조한 교육이었던 탓에 적절한 사용시기를 판단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저….."
해루는 빈 잣잔을 다시 한 번 쑥 앞으로 내밀었다. 입가를 실룩이던 중전이 차를 따라주었다. 잣잔을 든 해루가 정해진 자세와 동작으로 차를 마셨다. 찻잔을 공손히 들고, 팔을 움직여 차를 마시는 동작이 기계처럼 정확하였다. 반대로 말하면 기계처럼 딱딱하고 어색하였다. 항상 판자와 줄을 온몸에 감고 연습하다 보니 자연 차를 마시는 단순한 동작에도 절도가 넘치게 된 탓이다. 문제는 절도가 지나치게 넘친다는 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전이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골랐다.
“어떠…..하냐?”
중전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맛과 향을 음미하던 해루가 입을 열었다.
“훌륭합니다. 담백하게 시작하여 깊게 자리 잡고 부드럽게 가라 앉아 흩어지니 향기는 봄과 같이 화려하고 맛은 가을과 같이 한결 같습니다. 풍성하고 깨끗하여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청산유수 같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심운기의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조용히 해루를 바라보던 중전이 다시 물었다.
"….더 하겠느냐?”
중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루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혀가 떫어서 싫습니다.”
아뿔싸!
이런저런 궁중의 법도에 어긋나는 실수가 있었지만 해루는 다행히 초간택을 통과합니다. 하지만 다른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무어냐?"
"왜 하필 저입니까?"
“길 안내 말이더냐?”
“저 말고도 세자 저하껜 많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네가 제일 길 안내를 잘하기 때문이다.”
“그럴리가요.”
“어쩌면 다른 길잡이 중에 더 뛰어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허나, 내가 믿고 있는 사람 중에선 네가 최고였다.”
“……”
그저 말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위창에게서 들은 조언대로 향의 표정을 보았을 때 해루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향의 얼굴. 그의 얼굴엔 탐욕도 허영도 정욕도 아닌, 그저 담담한 미소만이 존재했다. 그 어디에도 위창이 말한 감정의 편린을 찾아볼 수 없었다. 덕분에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그러다 해루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마음이었다. 분수도 모르고 날띈 감정이었다. 감히 뉘를 상대로 가슴이 뛴단 말인가 감히 어디서 얼굴을 붉힌단 말인가.
하여, 한숨 푹 자는 걸로 가슴속에 쌓인 감정을 훌훌 털어냈다. 덕분에 향을 볼 때마다 미친 듯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 증상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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