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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박현욱 <스포주의>

 생각이 난다. 난 그 때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별 생각없이 책을 펼쳤다가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책을 덮지 못했다. 난 멀리도 심하게 하는데... 내 멀미를 이겨낸 첫 번째 책이었다.

당신이 목숨보다 사랑하는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를 하나 더 갖겠다고 하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인아가 말했다.

"우리집에서 커피 한잔하고 가실래요?"

천천히 마셨지만 커다란 머그잔은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그녀가 틀어놓았던 옛날 노래들도 다 돌아갔다. 그녀는 다시 노래를 틀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빙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는 건 고금의 진리. 나는 생애 최고의 용기를 냈다. 이래도 될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슴이 떨렸고 손이 떨렸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 심장의 박동 소리가 마치 십만 관중의 함성 소리처럼 커졌다. 십만의 관중이 내 귀에 대고 일제히 소리쳤다.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그래도 될까. 그녀의 얼굴 위로 입술을 포겠다. 그녀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십만의 관중이 환호했다. 그녀도 눈을 감았던가.


그 뒤로 덕훈은 인아와 몇 번의 데이트, 몇 번의 섹스를 했다.

내가 사랑을 고백하자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나도 덕훈씨를 좋아해요. 지금은 그래요. 그런데요. 미리 말해두지만 덕훈씨만 사랑하게 될 것 같잔 않아요.”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 혹은 시작하자마자 연애의 성격을 규정해본 적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연애가 곧 상대방이 생각하는 연애였다. 그녀는 달랐다. 이전의 평범한 연애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낯선 상황이었다.


인아는 간혹 연락이 되질 않았고, 때떄로 아침이 다 되어 귀가하곤 했다.

“밤새 연락도 안 되고 도대체 어셋밤에 어떻게 된 거야?” 

“술마셨어.”

묻고 싶지 않은 말.

“남자하고?”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어 .”

묻지 말아야 할 얘기.

“남자하고 같이 잔거 아니야?” 그녀는 나를 외면했다. 재차 물어봤다.

“같이 갔냐고.” 

“대답해야돼?” 

“그래.”

“그런 거 묻지 않기로 했잖아.”

그랬지. 그러나 아무도 위반하지 않는 룰이란 없다.

“명색이 애인인데 어떻게 안 물어?”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 대답을 듣기 원해?” 아니.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설마 했던 대답, 듣고 싶지 않은 대답, 최악의 대답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같이 잔거 맞아.”

“알았다.”

“원하는 대답을 들었으니 이제 됐지?” 

“아니.”

“그럼 또 뭐?” 

내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그만 헤어지자.”


하지만 덕훈의 영혼과 심장은 인아가 없는 시간을 견디질 못 했다. 불과 얼마되지 않아 인아를 다시 만나서 얘기했다.

“플라티니가 그랬지. 축구는 미스의 스포츠라고, 모든 선수가 완벽한 플레이를 펼치면 스코어는 영원히 0대 0이라고. 연애도 마찬가지로 미스의 게임 아니겠어? 모든 연인이 서로에게 완벽하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내내 좋은 때밖에 없다는 건 곧 내내 나쁜 때밖에 없는 것하고 다를 바 없잖아. 굴곡도 있어야 뭐가 좋은 건지도 알고 뭐가 나쁜 건지도 알게 되는 거잖아. 인아씨가 원하는 그런 애인이 되어주지 못한 건 미안해. 근데 상대방에게 실수도 하고 그러면서 서로더 알아가는 거잖아.”

플라티니가 도와준 것일까. 그녀가 웃었다.

“하여튼, 참. 거기서 플라티니가 왜 나와?”

“삼진 아웃제로 하자. 앞으로 그런 일이 두 번 더 반복되면 그땐 인아씨가 하지는 대로 할게.”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축구 룰로 해. 옐로카드 두번이면 레드카드야. 이제 한장밖에 안남은거야.”

덕훈은 옐로우 카드를 받고 다시 복귀 했다. 덕훈은 인아를 감당하지 못하리 예상을 하면서도 결혼을 추진했다.

아무리 이러쿵저러쿵해도 막상 해보지 않고서는모른다. 라고 인아에게 말했다. 집요하면서도 진지한 설득에 그녀는 조금씩 무너졌다. “절대 안 돼!”에서 “안 돼!”로. 거기서 “글쎄”로. 다시 “흠------”으로.

집시의 서약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이 식는다면 반드시 마음이 식었다고 말하고 헤어지겠다고 약속 했다. 또한 결혼생활중에 그녀의 사생활을 절대적으로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설령 다른 남자와 잔다고 해도 말이다. (어려울 것 있겠나.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데.) 만약에 아이를 낳은 뒤 이혼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아이 문제는 전적으로 그녀에게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인아를 설득해 결혼에 성공한 덕훈은 결혼생활의 큰 격랑을 만나게 된다.

어떤 남자인지, 어떻게 만났는지, 얼마나 많이 같이 갔는지 따위를 캐묻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잠시 나무 꾼의 집에 머물던 선녀가 이제 그녀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온 것일 따름이다.

살아오면서 내가 해왔던 수많은 말들 중에서 가장 멋있으면서도 가장 참담한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나는 당신이 행복해지는 데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 우리 이혼할까?

“나, 그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 .”

“그럼 그렇게 해. 이혼하면 되잖아.” 

“당선하고 이혼하고 싶지 않아.” 

“그러면?”

당신하고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싶어 . 그리고 그 사람하고도 결혼하고 싶어.”

“말도 안 돼!”

내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아내는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왜 말이 안돼?”

“사람이 원하는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어.”

“난 모든 걸 다 가지려는 게 아니야. 나는 다만 남편만 하나 더 가지려는 것 뿐이야.”

“그건 모든 것보다 더 많은 거야.”

“그렇지 않아. 당신이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돼. 조금만. 애정이 식지 않는 한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존중해주겠다고 했잖아. 내가 바람을 피운다 해도 애정이 식은 게 아니라면 당선은 나랑 같이 살 거잖아.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야.”

“존중할 게 따로 있지. 어떻게 그런 걸 존중하라고 해?”

“난 당신이 좋아. 당신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럼, 그놈과는 바람만 피워 .”

“그 사람을 사랑해. 같이 살고싶어.”

“그럼 경주에서 동거하면 되잖아.” 

“사랑하는 사람을 정부로 만들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의 정부로 남고 싶지도 않아. 결혼해서 같이 살고 싶어.”

“그래야만 한다면 나랑 헤어지면 되겠네.”

“당신이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당신의 나에 대한 애정이 변한게 아니라면 당신하고 헤어지고싶지 않아.”

니는 다시 말해야만 했다.

“사람이 원히는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니까.”

아내도 다시 말했다.

“모든 걸 다가지려는 게 아니야.”

내가 아내를 독점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미친놈은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것을 포기하면 서로 공평한 것인가?

공평은 무슨 얼어죽을 공평,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나도 미쳤다.


얼마 뒤 덕훈은 재경을 만났다.

“인아씨는 남편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저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인아씨의 사량을 존중합니다. 인아씨가 한 사람만 사랑한다면 저는 그 사량을 존중해주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제가 아니라고 해도요. 마찬가지로 인아씨가 여러 사람을 사랑한다 해도 저는 인아씨의 모든 사량을 다 존중해주고 싶습니다.”

덕훈은 화를 참지 못 하고 말했다.

"어금니 깨물어요."

아내와 나는 일 년 가까이 부부로 살았다. 사람의 감정을 양적인 잣대로 측정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아내가 자신의 말대로 나와 그놈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리고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부부로 살아왔던 시간은 내 편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내가 나와의 이혼을 택한다면? 지나간 시간을 과거의 일로 치부하고 그놈을 선택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람을 피우는 정도라면 모를까, 은밀히 애인을 두겠다는 거라면 모를까, 나 외에 다른 남편을 인정할 수는 없다. 아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아내를 놓아주어야 한다. 아내에게 매달린 끈을 끊어야 한다. 결론은 이미 났지만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지’라는 다섯 글자가 영화의 자막처럼 맴돌고 있다.

새벽녘에 거실로 나와보니 아내는 그때까지 소파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내내 울었는지 눈이 부어 있었다. 

“도장찍었어?”

머뭇거림 끝에 갈라진 목소리로 아내가말했다. 

“응. 당신이 원히는 대로 해.” 최후의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낭떠러지. 추락하는 일만 남았다. 아내는 내가 이혼을 원하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내가 원하는 건 절대로 이혼이 아니다. 아내가 그 놈과의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도장을 찍었다고 말했다. 다 끝나버린 것이다. 이제 물러서야 하는 이는 내가 되었다. 억울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내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소원 하나 당신이 들어주기로 한 거 있는데, 기억해?” 

“옐 클라시코 역대 전적으로 내기한 거?”

“그럼, 이혼하자고하지 말아줘. 그게 내 소원이야. 들어줄거지?” 

아내는 고개를 들고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혼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 소원이다. 단 아내가 또 하나의 결혼을 감행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나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 그리고 불쌍한 내 소원마저도 들어줄 수 없다. 아니다. 이렇게 이상한 상황올 만든 사람은 아내다.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이는 내 소원을 저버리는 이는 내가 아니라 바로 아내인 것이다. 

“월요일에 접수할게.” 

아내의 눈에 다시 물기가 어렸다.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꼭 그래야만 해?” 

나는 아내의 뺨이 젖어드는 것을 외면했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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